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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중고등학교 수학

쾨니히스베르크의 다리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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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 왕국의 쾨니히스베르크시를 흐르는 프레겔 강에는 크나이호프(A)와 롬세(D)라는 두 개의 섬이 있다. 이 섬을 연결하는 7개의 다리가 건설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은 이 다리를 건너 산책하면서 문제가 제기되었는데 문제는 다음과 같다.

'쾨니히스베르크시의 한가운데는 프레겔 강이 흐르고 있고 두 개의 섬과 연결되는 7개의 다리가 있다. 이 다리들을 한 번씩만 차례로 모두 건널 수 있겠는가?

쾨니히스베르크 다리 문제 (출처:  Leonhard Euler, Solutio Problematis ad Geometriam Situs Pertinentis, Commentarii Academiae Scientiarum Imperialis Petropolitanae 8 128-140.)

 ‘쾨니히스베르크의 다리’ 문제는 당시 프로이 센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많은 화제가 되어 당시 유명인사뿐만 아니라 언론에서도 이 내용을 다루었지만 해결되지 않아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면서 갑론을박(甲論乙駁)이 벌어졌다. 어떤 사람들은 모든 다리를 일일이 걸어 다니며 풀었는데도 서로 의견이 엇갈렸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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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기야, 바젤문제 해결로 유명세를 타고 있던 오일러에게 이 문제를 의뢰하였고, 오일러(Leohard Euler)는 이 문제를 [그림 2]와 같이 네 개의 정점(A~D)과 각 정점을 연결하는 일곱 개의 간선으로 도식화해 7개의 다리는 한 번씩 차례대로 건넌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1735년 논문으로 발표하였다. 
 이 내용은 오늘날 한붓그리기의 문제에 해당되며 이 내용은 그래프 이론으로 발전되어 푸앵카레의 추측, 상대성이론과 연결되는 위상기하학의 시작점이 된다.

[그림2] 오일러의 경로로 나타낸 쾨니히스베르크의 다리 (출처:https://ecosophialab.com)

위 문제를 오늘날 중학교 수학에서 다루는 한붓그리기 형태로 나타내면 [그림3]과 같다.

[그림3] 쾨니히스베르크의 다리를 나타낸 오일러의 경로 (출처:https://ecosophialab.com)

쾨니히스베르크의 역사

쾨니히스베르크는 당시 프로이센의 도시였으나 현재는 러시아령의 칼리닌그라드이다.

쾨니히스베르크는 프로이센공국(1807~1871)의 수도이자 왕도(王都)이다. 독일을 통일한 프로이센왕국(1871~1918)의 수도는 베를린이었지만  정신적인 수도와 왕도는 쾨니히스베르크였다. 쾨니히는 왕, 베르크는 도시라는 뜻이다.

독일은 1, 2차세계대전에서 패배하면서 옛 프로이센 영토를 많이 잃었는데 대부분 전쟁의 승자인 러시아와 피해자인 폴란드가 나눠 가져갔다. 독일은 2차 대전당시 폴란드를 침공하여 폴란드도시를 폐허로 만들고, 인구의 25%를 학살한 보상차원이다.

쾨니히스베르크도 이런 이유로 러시아의 도시 칼리닌그라드가 되었다. 

임마누엘 칸트

쾨니히스베르크하면 떠 오르는 유명한 사람이 있죠. 바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입니다. 아마도 현재까지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는 철학자입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1724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말안장을 만드는 장인으로 11명의 형제자매 중 넷째로 태어났는데 5명만 성인으로 살아남은 당시 평범한 중산층 가정이었다.

칸트는 쾨니히스베르크대학에서 수학과 철학을 전공하였으며 평생 경제적으로 어렵게 생활하였다.

칸트는 원리원칙자로 유명하다. 자신의 일과를 정해놓고 그 시간에 맞춰 평생을 생활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칸트는 죽을 때까지 쾨니히스베르크를 벗어나지 않았다. 

칸트는 매일 오후 10시에 자서 오전 5시에 일어났으며 오후 3시 30분에는 쾨니히스베르크 7개의 다리를 산책하였다.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를 지나쳐 사람들은 칸트를 보고 시계를 맞췄다고 한다. 칸트의 산책로는 현재 '철학자의 길'로 알려져 있다.

칸트는 3시 30분 산책을 평생 두 번 빼먹었는데 한 번은 장 자르 루소의 책 <에밀>을 읽다가 산책시간을 놓쳤고, 다른 하나는 프랑스 시민 혁명에 대한 신문 기사를 읽다가 산책시간을 놓쳤다고 한다.

칸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는데 두 번의 청혼을 받았다고 한다. 첫 번째 청혼을 받았을 때 결혼을 해야 할 이유와 하지 말아야 할 이유에 대하여 알아보고 정리하였는데 결혼해야 할 이유가 4개 더 많았다. 그래서 칸트는 청혼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는데 결정하기까지 7년의 시간이 지났고 청혼한 여자는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하여 아이까지 있었다. 두 번째로 청혼을 받은 경우도 마찬가지로 학문적으로 분석하다가 시간이 지나 청혼한 여인이 다른 곳으로 이사 간 상태였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난해하기로 유명한 책인데 당시 영국의 베이컨 중심의 경험론과 유럽대륙의 데카르트 중심의 합리론의 충돌과정에서 데이비드 흄의 철학이 합리론을 뿌리째 흔드는 순간에 합리주의 입장에서 칸트의 철학은 구원투수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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