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학/수학 이야기

유레카(Eureka), 적분의 시작 아르키메데스

728x90
반응형
아르키메데스(Archimedes B.C.287~B.C.212)는 이탈리아 시칠리아섬에 있던 옛 그리스 도시 시러큐스(syracuse)에서 태어났다. 당시 학문의 중심지였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의 왕립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코논 (Conon, B.C. 260년경)에게 기하학을 배웠다. 알렉산드리아에서 공부하던 중 나선의 원리를 응용해 나선식 펌프를 발명하기도 하였다. 그 후 자신의 고향인 시러큐스로 돌아와 많은 책을 저술하였으며 자신의 조국인 시러큐스를 로마군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시러큐스에서 생을 마감한다. 

어려서 천문학자인 아버지에게 천문관측을 배우고 자신이 터득한 이론을 실용화하고 응용하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한다.
아르키메데스 관련한 일화가 많이 있지만 가장 유명한 일화 중 하나는 부력의 법칙을 발견하게 된 이야기이다. 
아르키메데스가 자신이 목욕탕에서 물이 넘치는 것을 보고 깨달음에 기쁜 나머지 옷도 입지 않은 채 밖으로 뛰어나와 ‘알았다, 알아냈다(Eureka!, Eureka!)’라고 외쳤다는 얘기는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이다. 아르키메데스가 금 왕관에 은이 섞여 있는지를 알아냈다는 소문이 퍼져 아르키메데스의 명성은 더 높아졌다.
 
아르키메데스는 기하학에서 큰 업적을 남겼으며 그의 저서 중 <원의 측정>에서 원의 넓이는 임을 나타내었고, 원에 내접・외접하는 정96각형의 둘레의 길이를 이용하여 원주율의 값을 상당히 정확하게 구하였다. 그래서, 현재 많이 사용하고 있는 원주율의 근삿값 3.14를 아르키메데스의 수라고도 한다.

또, 아르키메데스의 저서 중 공간도형을 다룬 <구와 원기둥에 관하여> 에서
임의의 구의 겉넓이는 구의 대원의 넓이의 네 배이다고 밝혀 구의 겉넓이를 최초로 언급하였다. 
아르키메데스는 구와 원기둥의 관계를 밝혀낸 것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히 커 자신이 죽으면 묘비에 원기둥과 그 원기둥에 내접하는 구를 새겨줄 것을 유언하였다고 한다.

초기 미적분학자들은 아르키메데스가 구의 부피를 어떻게 구했는지 구체적인 방법을 찾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1906년 덴마크의 고전 문헌학자인 하이베르크(Heiberg, J.L)에 의해 콘스탄티노플(현재 이스탄불)에서 그동안 책의 존재만 알려진 <방법론(The Method)>을 발견하게 된다. 발견된 것은 양피지 사본으로 양피지에 쓴 내용이 지워지고 그 위에 다른 내용이 덧씌워진 책으로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지워졌던 내용이 일부 희미하게 나타나게 되어 이 책이 아르키메데스의 <방법론>으로 10세기 사본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중 분실되었다가 1991년 프랑스에서 경매에 나왔다. 지워졌던 내용에 대한 복원작업을 통하여 아르키메데스의 저서 중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방법론>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방법론>은 아르키메데스가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에라토스테네스에게 보낸 편지 형식의 글로 아르키메데스가 연구하고 정리(theorem)를 발견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이 발견됨에 따라 아르키메데스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아르키메데스를 3대 수학자 반열에 오르게 만든다. 
<방법론>에 소개된 구의 부피를 구하는 과정은 현재 정적분의 원리와 비슷한 무한소, 구분구적 개념과 지레의 원리를 이용하여 독창적으로 구의 부피를 구하였다. 이는 적분법의 시초를 아르키메데스로 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중해의 패권을 둘러싼 카르타고(현재 튀니지)와 로마의 세 차례 거친 포에니 전쟁(B.C.264~B.C.146)이 있었는데  2차 포에니 전쟁은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이 당시에 상상도 못한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로 진군하면서 로마와의 전투에서 대승하였다. 당시 한니발의 기세가 얼마나 컸었는지, 우리나라의 경우, 일제강점기때 아이가 울면 '일본순사온다'고 하면 아이가 울음을 그칠 정도였는데, 로마에서도 아이가 울면 '한니발이 온다'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이 승승장구함에 따라 로마와 동맹을 맺었던 나라들조차 카르타고의 편에 서게 되고 시러큐스도 그러한 왕국의 하나였다. 처음으로 패배를 맛본 로마는 한니발과는 전면전을 피하고 지구전을 펼치면서 카르타고 본토와 동맹국을 공격하였고, 3차 포에니 전쟁에서 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군에 의해 카르타고는 항복하고 로마는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하게 되는데, 시러큐스는 제2차 포에니 전쟁(B.C.218~B.C.202)에서 카르타고의 편을 들어 로마군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로마군은 시러큐스를 공격하였으나 번번이 아르키메데스가 지렛대와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하여 제작한 신무기인 투석기, 기중기의 공격에 고전하게 된다. 또, 거울로 태양의 빛을 모아 불을 붙이는 아르키메데스의 열선이라는 신무기를 제작하여 로마의 전함을 불태우기도 하였다. 

전쟁 중 아르키메데스의 일화가 있는데 해변에 군함을 만들어 배를 바다에 띄워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아르키메데스는 많은 사람 앞에서 배에 군사를 가득 태우고 도르래를 이용하여 간단하게 배를 바다 위로 옮긴 후 히에론 2세에게 나에게 긴 지렛대와 지렛목만 주면 지구라도 들어 올려 보이겠다고 한 말은 유레카와 더불어 아르키메데스의 명언으로 남아있다. 

기원전 211년 마르켈루스(Marcellus)가 이끄는 로마군은 2년여의 공방전 끝에 시러큐스를 함락한다. 마르켈루스는 아르키메데스를 존경하여 그를 죽이지 말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땅 위에 원을 그려놓고 연구 중이었던 아르키메데스는 원을 밟은 로마 병사에게 ‘내 원들을 밟지 말라’고 소리치다가 이 위대한 수학자는 로마 병사에 의해 생을 마감하게 된다.
마르켈루스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의 유언을 받들어 묘비에 직원기둥에 내접하는 원을 새겼다고 한다. 

기원전 75년 로마의 정치인, 변호인, 작가인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B.C.106~B.C.43)가 재무관으로 시칠리아로 부임되었을 때 아르키메데스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았으나 지역주민들조차 알지 못하였다. 키케로는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 끝에 무성한 가시나무 덤불에 가려진 묘비에 도형이 새겨진 아르키메데스의 무덤을 찾아내어 지역주민들의 많은 지지를 받았다. 그 후 키케로는 아르키메데스의 무덤을 잘 보존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아르키메데스의 무덤은 다시 잊혀졌다가 1965년 시러큐스에서 호텔 건축 중 아르키메데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무덤이 발견되어 세간의 관심을 모았으나 여러 정황상 실제 아르키메데스의 무덤일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한다.

아르키메데스는 수학 외에도 역학, 광학에도 많은 연구를 하여 그 원리를 실생활에 적용하였으며 현재까지도 그가 연구한 원리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아르키메데스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공부하던 시절 만든 나선 양수기는 현재에도 나일강 유역 지방에서 사용되고 있고 헬리콥터의 기본원리이기도 하다.
부력의 원리를 이용하여 잠수함, 놀이공원의 원형 보트에 사용되고 있고, 지레의 원리와 지레의 원리를 응용한 도르래는 현재 엘리베이터, 건축, 토목 등 여러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