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러(Leonhard Paul Euler, 1707~1783)는 스위스 바젤에서 태어나 평생 수학 연구에 매진하여 매우 광범위한 수학, 물리학, 천문학에 업적을 남겼는데 특히 수학 분야에서는 3대 수학자인 가우스, 아르키메데스, 뉴턴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오일러는 오일러의 아버지와 요한 베르누이와의 친분으로 요한 베르누이에게 수학을 배웠으며 무명의 청년 시절 80여 년간 미해결문제였던 바젤 문제를 해결하면서 유명해졌다.
중학교 수학 교과서에 나오는 ‘쾨니히스베르크의 다리’문제는 당시 유럽에서 많은 화제가 되어 당시 유명인사뿐만아니라 언론에서도 이 내용을 다루며었지만 해결되지 않아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면서 갑론을박(甲論乙駁)이 벌어졌던 모양입니다.
급기야, 바젤문제 해결로 유명세를 타고 있던 오일러에게 이 문제를 의뢰하였고, 오일러는 7개의 다리는 한 번씩 차례대로 건넌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하였다. 이 내용은 오늘날 한붓그리기의 문제에 해당되며 이 내용은 푸앵카레의 추측, 상대상이론과 연결되는 위상기하학의 시초가 되었다.
또, 오일러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로 유명한 프랑스의 수학자 피에르 드 페르마(Pierre de Fermat)가 제시한(대부분 증명되지 않은) 많은 수학 내용을 증명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는 1995년 영국의 수학자 앤드류 와일즈 (Andrew Jihn Wiles)에 의해 증명된 것을 보면 오일러도 이 정리만은 증명하지 못했나 봅니다.
요한 베르누이의 세 아들 니콜라우스 베르누이 2세, 다니엘 베르누이, 요한 베르누이 2세 모두 수학자가 되었고 오일러는 요한 베르누이 아들들과 형제처럼 친하게 지낸다. 훗날 요한 베르누이 2세의 아들과 오일러의 손녀는 결혼까지 한다. 요한 베르누이의 두 아들 니콜라스 베르누이와 다니엘 베르누이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에서 수학 교수와 생리학 교수로 있었는데 니콜라스 베르누이가 사망하면서 다니엘 베르누이가 니콜라스 베르누이의 자리인 수학 교수로 가고 다니엘 베르누이가 맡았던 생리학 교수 자리에 오일러를 추천하여 20세인 오일러는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로 가게 된다. 오일러는 다니엘 베르누이와 같은 집에 살면서 다니엘과 공동연구를 활발하게 한다. 6년 후 다니엘 베르누이가 병을 얻어 스위스 바젤대학으로 돌아오면서 오일러가 다니엘의 수학 교수 자리를 이어받는다.
오일러는 그곳에서 결혼하고 28세에는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게 된다. 1741년 프리드리히 대왕의 초청을 받고 베를린 아카데미로 갔다가 1766년 예카테리나 2세의 초청으로 다시 러시아로 돌아간다. 오일러는 연구에 매진하며 몸을 혹사시켜 나머지 눈마저 시력을 잃게 된다. 하지만 그의 열정은 식지 않았고 시력을 잃은 후에도 17년 동안이나 많은 연구와 논문을 발표하였다. 페르마는 증명없이 발표한 내용이 많은데 오일러와 가깝게 지내던 골드바흐의 종용으로 페르마가 발표한 많은 내용을 증명하여 인정받게 하였다고 한다.
오일러는 베르누이 가문과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요한 베르누이와 다니엘 베르누이가 파리대학에서 열린 과학경연대회에 제출한 논문이 요한과 다니엘이 공동 1등을 수상하게 되었다. 요한은 아들인 다니엘과 공동 1등으로 수상한 것에 몹시 자존심이 상해 아들 다니엘을 집에서 쫓아낸다. 다니엘 베르누이는 비행기의 뜨는 원리를 밝혀낸 베르누이의 원리로 유명한데 베르누이의 천재가문에서도 최고의 천재로 꼽는다. 다니엘의 유명한 저서 <유체역학>을 발표하기 전 우연히 그 내용을 본 요한은 그 내용이 대단한 것임을 직감하고 그것을 표절하여 <수력학>이란 제목으로 먼저 발표를 하자 다니엘은 요한의 표절을 문제 삼았다. 요한 베르누이는 자신이 먼저 연구한 내용이라며 증인으로 자신의 제자인 오일러를 내세웠는데 오일러는 스승과 친형처럼 따르던 다니엘 베르누이 사이에 난처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오일러는 어쩔 수 없이 스승인 요한 베르누이 주장에 따랐고 이로 인해 오일러는 다니엘 베르누이와 멀어지게 되었는데 얼마 못 가서 요한 베르누이가 표절한 것으로 밝혀졌다.
1783년 9월 18일 오일러는 새로 발견한 우라노스(천왕성)의 궤도를 연구하던 중 뇌출혈로 쓰러지고 얼마 후 사망하였다. 평생 그가 얼마나 연구하고 문제를 풀었는지 사람들은 오일러가 사망한 걸 오일러가 풀기를 멈췄다고 표현했다.
오일러는 교과서를 편찬하면서 학생들이 이해하기 쉽게 지수와 로그가 서로 역함수 관계임을 보였고 수학적 기호, 표기 등 많은 것을 정리하였다. 예컨대 x에 대한 함수를 f(x)로, 자연상수를 e, 원주율은 pi(∏), 허수단위는 i , 합의 기호는 ∑ , 내접원의 반지름을 r , 외접원의 반지름을 R , 다각형에서 변의 길이는 a,b,c,···, 각은 A, B, C,···,로 표기하면서 현재까지 세계 중·고등학교 수학책에서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고등학교 수학 교과서에서 삼각함수를 원을 이용하여 정의한 것도 오일러이다.
오일러는 수학 논문을 많이 낸 수학자로도 유명한데 약 92권의 전집과 866편에 달하는 논물을 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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