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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수학 이야기

해석 기하학의 창시자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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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 초상화

데카르트 (René Descartes, 1596~1650)는 프랑스의 철학자, 수학자, 물리학자로 근대철학의 아버지, 합리론의 창시자로 불릴 만큼 근대 유럽 철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내가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은 정확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것이든 분명하고 확실한 근거를 요구했고 경험이 아닌 이성을 통해 진리를 찾아야 한다는 합리주의를 주장하였다. 중세 스콜라철학을 배제한 데카르트의 이러한 철학적 방법론은 자연과학과 수학의 급격한 발전을 이끌어내는 원동력이 되었다.

데카르트는 프랑스의 작은 도시 라에(La Haye)에서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라에(La Haye)는 1996년 데카르트 탄생 400주년을 기념하여 도시 이름을 데카르트로 바꿨다고 한다. 데카르트 어머니는 데카르트를 낳고 1년 후 사망하였고 데카르트 역시 태어날 때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 몸이 약한 데카르트를 걱정하여 데카르트 아버지는 늦은 나이에 학교에 입학시켰는데 엄격한 기숙학교였지만 몸이 약하여 새벽 미사를 보는 것을 빠지고 특별히 늦잠 자는 것을 허락하였다고 한다. 데카르트는 이때부터 평생 늦잠 자는 습관을 갖게 되었고 아침 침대에서 사색을 즐겼다고 한다. 이러한 사색하는 습관이 훗날 데카르트 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데카르트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대학에 입학했지만, 1616년 ‘세상이라는 커다란 책’을 배우기 위해 대학을 그만둔다. 나는 글로 하는 공부를 완전히 그만두었다. 나 자신 안에서 찾을 수 있는 지식이나, 세상이라는 커다란 책에서 찾을 수 있는 지식 외에는 추구하지 않기로 했다며 다양한 경험을 위해 여러 곳을 여행하고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만나며 술, 도박, 여자에 빠지기도 한다. 여행 중에 배를 타고 가던 중 배에서 몇 사람이 데카르트를 죽이고 그의 재물을 갖고자 음모를 꾸몄으나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그들을 제압하였다고 한다. 군에 입대하여 전투에도 참전하고 자신의 약한 몸을 극복하고자 노력하여 검술에 능한 군인이 되기도 한다. 세상이라는 큰 책에서 배움을 얻고 그는 1623년 고향 라에에서 자신의 재산을 모두 팔아 연금 형태로 받을 수 있게 하여 생활을 유지한다.

1637년 <방법서설>을 출간하였는데 제4부에 데카르트 사상의 기본이 되는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가 나온다. 1642년경부터 데카르트는 크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 책에서 데카르트가 보여준 철학적 내용은 전통적인 철학사상과 신학의 기반을 뒤흔들만한 혁신적인 것으로 평가받았지만 중세의 신학 사상을 중시하는 신학자와 철학자들이 공공연하게 데카르트를 비난했다. 마침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이 간곡하게 데카르트를 자신의 개인 교사로 초빙했고, 데카르트는 1649년 가을 스톡홀름으로 갔다. 그리고 이듬해인 1650년 2월 11일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공식적인 사인은 폐렴이었다. 데카르트는 새벽에 잠들어 정오 가까운 시간까지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는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나 크리스티나 여왕은 매일 이른 아침 데카르트와 만나려 했고, 이것이 데카르트의 면역 체계를 극도로 악화시켰다는 설이 있고 독살설도 있다. 스톡홀름에서 활동하던 프랑스 가톨릭 선교사 자크 비오그 신부가 영성체 빵에 독극물을 발라 데카르트에게 주었다는 설이다. 신교 국가인 스웨덴이 가톨릭 국가로 바뀌기를 바랐던 비오그 신부가, 데카르트의 혁신적인 사상이 스웨덴 여왕에게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을 우려하여 독살하였다는 설이다. 

1663년 교황청은 데카르트의 저서를 금서 목록에 올렸다. 데카르트의 유해는 스톡홀름의 묘지에 묻혔다가 1666년 프랑스로 옮겨져 파리 생제르맹데프레 성당에 묻혔다. 1792년 유해를 팡테옹으로 이장하기 위해 묘지를 발굴한 결과 시신에는 두개골이 없었다. 두개골은 시신을 수습한 스웨덴 근위대장이 따로 보관해 오다가 19세기말 경매에 부쳐져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보통 데카르트는 철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철학 외에도 우주론, 광학, 기상학, 기하학, 생리학에 관하여 연구하였다. 모든 분야에서 한 사람이 평생 이루기 힘든 업적 이상으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고 한다. 특히 수학에서는 기하학에 대수적 해법을 적용한 해석기하학의 창시자로서 근대 이후 수학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1637년의 그의 논문 <방법서설>에 실린 세 가지 부록 가운데에서 기하학이라는 제목이 붙은 마지막 부록에 근거하여 해석기하학의 시작으로 본다. 

해석기하학의 시작은 데카르트와 페르마에 의해 독립적으로 이루어졌다. 
페르마가 1636년에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힌 내용은 많은 새로운 곡선을 제안하였고, 대수적 방정식도 정의하였다. 방정식에서 시작해서 그것의 궤적을 연구하였다. 사후에 출판된 <평면 및 입체 궤적입문>에 그 내용이 실려 있다. 데카르트에 비해 페르마가 훨씬 더 많이 방정식의 그래프를 연구한 것으로 보인다. 

16세기는 대수학의 시대로 3차, 4차 방정식의 일반해법이 발견되고, 문자기호의 도입과 허수개념이 도입되었다. 지리상의 발견과 항해술의 발달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뒷받침해주었고, 갈릴레이의 자유낙하 법칙의 발견과 케플러의 행성운동 법칙의 발견 등 천문학과 역학의 발전을 가져왔다.
데카르트는 그는 모든 기하 문제의 해결에 적용할 수 있는 일반적인 방법을 찾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현재 중고등학교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는 직교좌표가 데카르트에 의해 만들어지게 된다. 그의 이름을 따서 데카르트 좌표(cartesian coordinate)라고도 한다. 

우리는 직교좌표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사용하고 있지만 직교좌표는 해석기하학이라는 새로운 수학의 탄생과 수학발전에 급물살을 일으키게 된다. 우리가 중고등학교에서 수학 시간에 배우는 많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데카르트는 직선에 실수를 대응시켜 평면좌표 개념을 도입하고 점을 순서쌍로 나타내어 평면을 대수적인 방법으로 표현하였다. 미지수가 2개인 방정식에서 미지수는 좌표로 미지수의 값은 좌표로 나타내어 평면에 방정식을 만족하는 점들의 자취를 나타낸 것이다. 일차방정식은 직선으로, 이차방정식은 원뿔곡선을 나타낸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발상은 함수개념과 미적분학을 탄생시키게 하였다.

이러한 직교좌표를 이용한 방법은 도형에 관한 다양한 문제를 대수적으로 해결하게 하였다. 선분의 분할문제, 그래프를 이용하여 방정식의 해를 구하고, 이차곡선과 같이 어떤 기하학적 성질을 만족하는 곡선의 방정식을 구하여 그 성질을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해석기하학이 나오면서 기하학 정리를 대수적으로 증명할 수 있게 되었고, 역으로 대수 정리를 기하학적으로 해결하거나 그 대수적인 성질을 밝히는 데 이용할 수 있게 하였다. 방정식이라는 대수학과 그래프라는 기하학을 연계시켜 해석기하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의 지평을 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직교좌표의 기본 바탕엔 실수의 연속성을 수직선에 도입한 것이다. 오늘날에는 직교좌표 외에 극좌표계(polar coordinate system), 원통 좌표계(Cylindrical coordinate), 구면좌표계(Spherical coordinate), 공간좌표 등이 사용되고 있다. 

현대 수학은 뉴턴과 라이프니츠가 남긴 미적분학과 데카르트가 남긴 해석기하학을 기반으로 한다. 데카르트 철학은 과학적 탐구 방법을 탄생시켰다. 수학의 증명 방법, 과학의 탐구 방법에서 연역법과 귀납법은 양대 산맥을 이루는 방법으로 연역법은 데카르트의 합리주의를, 귀납법은 베이컨의 경험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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