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학/수학 이야기

짧은 생을 살다 간 천재 수학자 갈루아

728x90
반응형

에바리스트 갈루아(Évariste Galois, 1811~1832)는 프랑스의 천재적인 수학자로 수학에 대한 자부심이 굉장히 강하였다. 10대 때 다항 방정식이 사칙연산과 거듭제곱근만을 사용하여 대수적으로 풀리기 위한 조건을 찾아냈다. 이 과정에서 수열을 특정한 수학적 조건에 따라 묶는 방법의 하나인 군(群, group)이란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이는 추상대수학의 군론과 갈루아 이론에 기반이 되었다. 

프랑스는 미국독립전쟁 지원으로 재정이 어려워지고 사회적으론 계급갈등이 고조되어 1789년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단두대에서 처형하는 프랑스혁명이 일어난다. 정치는 왕정에서 나폴레옹이 유럽에서 최초로 프랑스 공화국을 설립하고 프랑스혁명사상이 유럽에 영향을 미치며 다른 유럽 국가의 심한 견제와 전쟁으로 얼룩졌다.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왕정의 시대로 복귀한다. 스탕달의 소설 <적과 흑>은 이 시기의 프랑스 사회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정치·사회적으로 혼란한 시기인 1811년 갈루아는 파리 근교에서 태어났다. 11세가 되던 해까지 행정관료인 아버지와 법률가 출신인 어머니에게 교육을 받으며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12세에 파리의 루이 르 그랑 고등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프랑스 대혁명 후 군주정과 공화정이 격돌하는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기였다. 어수선한 정국과 맞물려 갈루아는 점점 학습에 흥미를 잃고 수학에만 몰두하였다. 갈루아는 학교 수업 시간에 모든 계산을 암산으로 하여 풀이를 쓰지 않았는데 당시 담당교사는 이를 불성실하고 반항적인 행동으로 여겨 수학 성적은 좋게 나오지 않았다. 당시 교사들은 갈루아에 대하여 ‘구원하기 어려울 만큼 건방지다’, ‘수학적 광기가 그를 사로잡고 있어 수학만 하도록 하는 게 좋을 것이다’, ‘품행이 불량하다’ 등으로 평가하였다고 한다.

 갈루아는 아드리앵마리 르장드르의 <기하학 기초>를 한 번에 읽고 그 내용을 숙지하였으며 15세에는 조제프 루이 라그랑주의 <대수 방정식의 해법 탐구>를 읽고 자신의 방정식 이론을 세우는 기반이 되었다고 한다. 자신을 인정하고 이해해 주는 루이 폴 에멜 리샤르 교사를 만나면서 수학에 매진하여 18세 되던 해에 순환 연분수(continued fractions)를 주제로 한 논문과 방정식론에 관한 논문을 프랑스 과학원에 제출하였으나 당시 심사관이었던 오귀스탱 루이 코시(Cauchy, Augustin Louis Baron, 1789~1857)는 그 논문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논문과 요약본마저 분실하여 발표하지 못하였다.

갈루아의 아버지는 왕정 시대에 공화정을 지지하였고 오랜 기간 부르라렌 시장으로 역임하던 중 왕정을 지지하는 반대파의 모욕과 수치를 견디다 못해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아버지의 정치적 음모, 논문의 분실사건 등으로 인해 갈루아는 사회에 대한 불신을 갖게 되었다. 아버지가 사망한 직후 두 번째로 수학 최고 명문인 파리 고등 이공과 대학교(Ecole Polytechnique) 입학시험에 응시하였으나 면접시험에서 떨어지고 사범학교인 Ecole Normal에 입학한다. 
그가 왜 떨어졌는지에 대해 여러 설이 있는데 천재성을 과신해 시험 준비를 너무 소홀히 했다거나 아버지 사망으로 인한 정서적 불안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에콜 노르말과 프랑스 국립과학원(CNRS) 교수였던 이브 앙드레 교수는 당시 면접관이 산술 대수에 대하여 설명하라고 질문하자 갈루아는 산술 대수라는 수학 용어는 없으므로 설명할 것이 없다고 대답해 면접관을 격분시켰다고 말했다.

갈루아는 5차 이상 다항 방정식을 대수적으로 풀 수 있는 조건과 아닌 조건을 구분하는 필요충분조건을 증명하는 내용이 포함된 논문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 보냈고 아카데미상을 기대하였다. 갈루아는 이 논문이 많은 수학자에게 5차 방정식의 해를 찾는 연구를 단념시킬 것이라고 자신만만하였다.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조제프 푸리에(Jean B.J.Fourier, 1768~1830)는 그이 논문을 높이 평가하며 수학상 심사를 의뢰하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최종 심사를 앞두고 푸리에가 사망하면서 갈루아의 논문은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당시 프랑스 언론에서도 갈루아의 논문에 관심 갖고 심사의 공정성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였다. 갈루아는 이러한 사건이 또 생기면서 격분하여 부패한 사회와 프랑스 정치체제에 큰 불신을 갖게 되고 군주정을 반대하는 공화주의 편에서 과격한 활동을 하게 된다.

1830년 7월 혁명이 터지자 갈루아는 공화정을 격렬히 옹호하였으며 군주정을 옹호하는 교장을 비방하는 글을 올려 결국 학교에서 퇴학당한다. 이후 그는 공화주의 세력인 국가방위군 포병대에 입대한 후 몇 차례 감옥에 수감되었다. 감옥에 있던 기간 중 다시 수학 연구에 매진하여 사망하기 전해인 1931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 다시 논문을 제출하였다. 이번 심사엔 시메옹 드니 푸아송(Siméon Denis Poisson)이 맡았고 푸아송은 논문 내용이 명백하지 않고 엄격한 체계를 갖추고 있지 않아 내용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며 연구 내용을 모아서 보내 줄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갈루아는 그 이후 바로 구속되어 연구 내용을 보내 줄 수 없었다. 많은 천재가 그렇듯이 갈루아는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것이 서툴렀다고 한다.

1832년 출옥 후 고통과 상실감에 빠져있다가 생애 처음으로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지만 그녀는 약혼자가 있었고 그녀의 약혼자가 피스톨(권총) 결투를 신청하였다. 이 사건의 정황에 대하여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어쨌든 갈루아는 이런 사건에 휘말리게 되었고 결투 신청을 거부할 수 없는 입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투를 신청한 상대가 명사수임을 알고 있었기에 결투하기 전날 밤 그는 죽음을 예견하고 자신이 연구한 내용을 정리하며 써 내려갔다. 그리고 자신의 친구인 슈발리에에게 자신의 연구물과 편지를 남겼다. 

‘야코비나! 가우스에게 평해 달라고 해 줘. 이 정리들이 참인지가 아니라, 이 정리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훗날 사람들은 이 엉망인 내용을 해석할 필요가 있을 테니까.’

1832년 5월 30일 갈루아는 권총을 사용한 결투에서 복부를 관통당하는 총상을 입고 다음 날 사망하였다.
죽기 전날 갈루아의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온 남동생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울지 마, 알프레드! 21살 나이에 죽으려면 용기가 필요하니까!’
그는 공동묘지에 묻혔고 그가 남긴 것은 겨우 60페이지밖에 되지 않는 수학연구물이었다.

오랜 기간 5차 방정식의 해법을 찾고자 많은 수학자가 노력하였으나 짧은 생을 살다 간 갈루아라는 천재 수학자에 의해 5차 이상의 방정식의 대수적 풀이가 불가능하다는 정리가 증명되었다. 그러나 갈루아의 논문은 빛을 발하지 못하고 사장되었다. 가우스는 갈루아의 논문을 제대로 읽지 않은 것에 대하여 나중에 후회하였다고 한다. 저명한 수학자 코시조차도 갈루아의 논문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푸아송의 말대로 논문의 체계가 부족하였거나 어쩌면 관심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갈루아가 사망한 이후 갈루아 이론의 가치를 알아본 리우빌이 자신이 창간한 잡지에 갈루아 이론을 실어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아벨이 5차 이상의 대수 방정식은 대수적인 방법으로 풀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였고 갈루아에 의해서 대수 방정식이 대수적으로 풀 수 있는지는 근에 대한 치환 군(아벨 군)의 군론적 구조에 따라 명백해진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는, 오늘날 대수학에서 갈루아 이론의 바탕이 되었고, 현대 수학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