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학/수학 이야기

베르누이 家의 이야기 (야곱 베르누이와 요한 베르누이)

728x90
반응형

니콜라우스 베르누이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수학자 야곱 베르누이 (16541705), 화가이자 바젤 시의회 의원인 니콜라우스 베르누이(1662-1716), 수학자 요한 베르누이 (1667-1748), 약사인 히에로니무스 베르누이(1669-1760)이다.

야곱과 요한은 당대 최고의 수학자로 수학과 물리학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한다. 이 가문은 17~18세기에 거쳐 8명의 수학 거장을 배출한 천재가문이다.

아버지 니콜라스는 첫째 아들인 야곱은 당시 최고의 지식인으로 인정받는 신학자가 되기를 원했고 셋째 아들인 요한은 가업을 이을 약품사업가가 되기를 원하였다.

야곱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바젤대학에 입학하여 철학과 신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지만 신학보다 수학과 천체물리학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았다. 아버지 몰래 독학으로 수학과 천체물리학을 공부하던 그는 신학 공부는 접어둔 채 수학과 과학의 대가들에게 배우기 위해 5~6년간 유럽 전역을 다니며 여행을 했다.

야곱은 긴 여행 동안 수학과 물리학에 흠뻑 빠져들었고 1682년 스위스 바젤로 돌아와 1682년 바젤대학에서 물리학을 강의하게 된다. 야곱은 1684년에 발표된 라이프니츠의 미적분학에 관련된 논문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 야곱은 즉시 라이프니츠에게 서신을 보내며 라이프니츠에게 미적분을 배운다. 야곱은 미적분에 매료되어 모든 시간을 미적분을 공부하는데 쏟아부었다.

반응형

한편 요한은 아버지의 뜻과 달리 약품 사업의 도제가 된 후 바젤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였다. 그러는 와중에 요한은 수학에 빠져 지내는 형 야곱에게 틈틈이 수학을 배우며 요한 역시 미적분에 매료되어 수학에 매진하게 된다.

요한도 형 야곱과 마찬가지로 수학에 매료되어 1687년경부터 형 야콥과 협력하여 해석학을 연구하였고, 그 전개에 공헌하게 된다.

야곱과 요한은 아버지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수학에 빠져 당대 최고의 수학자인 라이프니츠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라이프니츠로부터 수학자로 인정을 받게 된다..

야곱과 요한은 당대 최고 수준의 수학자 반열에 오르게 되고 라이프니츠와 뉴턴의 미적분을 보완하여 획기적으로 진보시키는 역할을 한다.

야곱은 확률론의 창시자로 불리며, 대수의 법칙, 베르누이의 수, 변분법, 베르누이 실험, 베르누이 부등식 등의 업적을 남겼다.

특히, 오일러의 수로 불리는 자연상수도 야곱이 발견한 숫자이다.

오일러가 e라고 표기하며 자신의 이름을 붙여 오일러의 수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발견자는 야곱이다.

오일러의 스승인 요한은 미적분을 이용해서 사이클로이드가 최소강하곡선임을 증명했고, 로피탈 정리(L'Hospital's rule)의 실제 발견자이고, 수학 외에도 항해이론, 가상변위의 원리 등 물리학, 화학, 천문학에 광범위하고 독창적인 업적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형제이자 스승과 제자인 이 두 천재 수학자는 뉴턴을 배척하고 라이프니츠를 추종하는 점에선 같았지만 죽을 때까지 서로 용서를 하지 않는 극심한 불화를 겪게 됩니다.

야곱은 당시 유렵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라이프니츠와 요한이 서신을 주고받으며 요한이 자신보다 더 중심인물로 떠오르자 이를 시샘하던 차 요한이 자신을 은연중 무시하기도 하여 기분이 많이 상해있던 중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하는데, 중력을 받는 입자가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가장 짧은 시간 안에 이동할 수 있는 곡선 경로를 찾는 사이클로이드 곡선의 문제였다.

뒤편에서 다시 자세히 다루겠지만,

요한은 이 문제를 당대 유명한 수학자에게 문제로 제시하였고 뒤에 해법을 제시하였는데, 그 해법에 잘못된 부분이 있어 형인 야곱이 이를 지적하고 자신의 풀이방법이 옳다고 주장하였는데, 요한은 야곱에게 아무런 양해도 구하지 않은 채 자신의 잘못된 부분을 야곱의 증명방법으로 고치고 이를 자신의 증명한 것처럼 발표하였다. 이에 야곱은 요한이 자신의 해법을 도용했다며 요한을 비난하며 불화가 시작되었는데 이를 두고, 수학계에선 트로이 전쟁의 불화의 사과와 견주어 사이클로이드 곡선으로 두 형제의 불화가 시작되어 사이클로이드 곡선을 불화의 사과라고 부르게 되었다.

야곱은 당시 유럽에 수학 교수자리가 10개 정도였는데 수학자로서 실력을 인정받아 1686년 바젤 대학의 수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바젤대학 교수로 있던 야곱은 요한이 대학교수로 임용되는 것을 철저히 방해하여 결국, 요한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된다.

요한은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수학, 물리학 공부를 계속하면서, 해석학을 물리학에 응용하는 문제에도 관심을 가졌으며 1690년부터는 파리에 머물며 무한소해석(無限小解析)’‘적분법을 체계적으로 강의하였다. 하지만 강의료는 요한이 파리에서 생활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였다.

그렇게 생활하던 중 요한은 편지 한 통을 받게 된다.

친애하는 요한에게 -

우리는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인 것 같소.

나는 당신의 지적인 재능이 필요하고 당신은 나의 재정적 도움이 필요하지요, 그래서 이렇게 제안하오.

나는 올해 연금으로 300 리브르를 지급하고, 당신이 내게 보낸 여러 잡지의 대가로 200 리브르를 더 내겠소. 나는 당신의 모든 시간을 나에게 바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고, 어떤 의문이나 문제가 생길 때마다 약간의 시간만을 내주기를 원하는 것이오,

나는 당신이 새롭게 발견한 사실들에 대하여는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말고 나에게만 알려주기를 바라겠소. 특히 당신이 나에게 보낸 내용의 복사본을 다른 사람에게는 보내지 말 것을 요구하오. 나는 그것들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소.

                                                                                                                                                         - 로피탈 후작

기욤 드 로피탈은 프랑스의 군인 가문의 후작 귀족 자제로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군인이 되고자 하였으나 시력이 좋지 않아서 군인이 될 수 없었다. 그 후로 로피탈은 수학에 몰두하였고 프랑스의 유명한 수학자, 물리학자를 배출한 과학 아카데미에서 활동하였다.

부유한 가문의 자제였던 로피탈은 자신보다 6살이나 적은 젊은 요한의 수학 실력과 그의 생활고를 알게 되어 요한에게 수학을 배우고자 편지를 보낸 것이었다.

편지를 받은 요한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려운 생활고를 벗어나는 게 우선이었다.

당시 파리의 방직공 노동자의 경우 남자는 하루 1 리브르, 여자는 0.25 리브르를 버는 정도였고 군인 장교의 연봉이 300 리브르 정도였다.

로피탈이 제시한 연금 300 리브르에 추가 지금되는 금액 200 리브르는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이렇게 요한은 1691~1692년 사이 18 개월 동안 로피탈의 개인 교사로 고용되었다.

어느 정도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난 요한은 파리에서 결혼을 하고 1693년에는 라이프니츠와 해석학에 대한 서신을 주고받으며 라이프니츠의 미적분 연구에 몰두하게 되면서 라이프니츠의 추종자가 된다. 1695년 흐로닝언 대학교의 수학 교수로 가게 되어 파리를 떠나 네덜란드로 가게 된다.. 이때 요한의 첫째 아들 니콜라우스가 태어난다.

그가 프랑스에 머무는 동안 1695년 네덜란드 그로닝겐(Groningen, 흐로닝언) 대학교의 호이겐스(Huygens)가 요한에게 그로닝겐 대학의 교수직을 제안함으로써 요한은 결국 네덜란드에 정착합니다. 그 이후 야곱과 요한 형제는 학술지와 편지를 통해 서로를 비방하며 헐뜯었다.

형인 야곱이 결핵으로 사망하고 나서야 이들의 싸움은 끝이 났다. 형이 죽고 나서야 요한은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바젤 대학 수학 교수직을 차지하게 된다.

 

반응형